시위, 시민 불복종, 그리고 반대 운동은 식민지 시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미국의 공동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캠퍼스, 정치 대회, 그리고 그 외 다양한 장소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부 역사적인 행진, 연좌시위, 그리고 기타 행동들은 미국 사회의 공동 서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반면, 다른 사건들은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했던 문화적 경관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장소들은 Landslide 2024: Demonstration Grounds의 초점이 되는 곳이며, 미국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잊혀진 사건들의 이야기를 다시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The Cultural Landscape Foundation (TCLF)의 새로운 보고서와 디지털 전시를 통해 소개되는 미국 전역의 13개 장소들은 역사적으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운동을 촉진했던 사건들과 맞닿아 있다.
최초의 정착지부터 현대의 대도시에 이르기까지, 도시는 항상 집단적 참여의 필요성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이며, 도시화는 이러한 본질적인 특성을 반영하여 문화, 정치, 경제의 공동 발전을 촉진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집단성(Collectivity)은 아이디어와 행동에 힘을 실어주며, 개인의 요구를 집단적 운동으로 전환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시는 시위와 저항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대학, 시장, 광장, 공원과 같은 공간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힘을 가지며, 사회적 참여를 유도하고 대중의 불만을 표출하는 중요한 장소로 기능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한 장소를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를 확장하고 역사적 의미를 보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문화적 경관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역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되며, 미래 세대가 자신들의 유산을 직접 만들어갈 수 있도록 참여를 독려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시위와 대중적 반대 운동은 건강한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번 세대가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지 기대됩니다.”
– 제이넵 투펙치(Zeynep Tufekci), 프린스턴 대학교 사회학 및 공공정책 교수, 뉴욕 타임스
디지털 전시 Landslide 2024: Demonstration Grounds를 기반으로, 우리는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펼쳐졌던 일곱 곳의 주요 장소를 조명하며, 이들이 도시 공간 형성에 미친 영향과 집단적 기억을 보존하는 역할을 탐구한다. 이 시위들은 민권 운동, LGBTQ+ 권리, 장애인 권리, 도시 재개발, 주권 및 자기 결정권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어 왔다. 보스턴, 애틀랜타, 뉴욕, 필라델피아와 같은 도시에서 벌어진 이 시위들은 집단적 행동이 소외되고 대표성이 부족한 공동체에 힘을 실어주며, 그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알리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시장을 지키고 공동체를 보호하다: 시애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Market)
1964년,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 내 로웰스 카페(Lowell’s Café)에서 한 무리의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은 “Friends of the Market”라는 옹호 단체를 결성하였으며, 1907년부터 운영되어 온 이 시장의 철거를 막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미국 국립사적지(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에 등재된 9에이커 규모의 역사적 지구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단체는 건축가 빅터 스타인브룩(Victor Steinbrueck)이 주도했으며, 1966년 국립역사보존법(National Historic Preservation Act)이 제정되기 2년 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이 운동은 조경 건축가 로리 올린(Laurie Olin)과 리처드 하그(Richard Haag)의 지지를 받으며 더욱 확산되었다. 이들의 노력은 시민 주도의 강력한 보존 운동의 초기 사례 중 하나로, 이후 많은 보존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성공적인 모델이 되었다. 이는 단순한 시장 보호 운동을 넘어,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고 공공 공간을 보존하는 데 있어 시민들이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선례로 남아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용 해변을 향한 노력: 마이애미 비스케인 만
미국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의 일부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백인 전용 해변(whites-only beaches)에서 “웨이드-인(Wade-in)”이라 불리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쳤다. 이는 백인 전용으로 제한된 해변에서 흑인들이 바다에 들어가며 차별에 저항하는 방식이었다. 1945년, 마이애미 남쪽에서 벌어진 웨이드-인 시위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용 해변(African American beach)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1959년 또 다른 웨이드-인은 마이애미 해변의 인종 차별 철폐(Desegregation of Miami’s beaches)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역사적인 저항 운동이 펼쳐졌던 해변들에는 그 의미를 설명하는 안내판이나 기념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1945년 웨이드-인 이후 조성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용 해변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그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는 해석 자료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장소를 보존하고, 그 의미를 널리 알리는 작업은 시민운동의 중요성을 기억하고 미래 세대에게 민주주의와 평등을 위한 투쟁을 전승하는 데 필수적이다.


공격적인 도시 재개발에 맞선 저항: 보스턴 텐트 시티(Tent City)
보스턴 사우스엔드(South End) 지역에 위치한 3에이커 규모의 부지는 1968년 4월, 보스턴 재개발청(Boston Redevelopment Authority, BRA)의 도시 재개발 계획에 맞서 열린 4일간의 대규모 항의 시위의 중심지였다. 당시 보스턴 재개발청은 이 지역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으며, 68채의 주택, 한 개의 커뮤니티 센터, 두 개의 공원을 철거했다. 이에 민권운동 지도자 멜빈 H. “멜” 킹(Melvin H. “Mel” King)과 여러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텐트 시티(Tent City)”라는 임시 거주지를 형성했고, 400명 이상의 시위대가 이곳에서 생활하며 저항했다. 이 항의 운동이 끝난 후 20년이 지난 1988년, 비영리 개발업체 연합인 텐트 시티 코퍼레이션(Tent City Corporation)은 이 역사적 시위를 기리기 위해 269세대의 혼합 소득 주거단지(Mixed-Income Housing Development) “텐트 시티”를 개설했다. 이곳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도시 재개발로 인해 희생된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고, 서민들을 위한 주거권 보장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보스턴 텐트 시티는 공격적인 도시 재개발에 맞선 시민 저항의 강력한 사례로, 향후 도시 계획에서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공원부지를 고속도로로 전환하는 계획에 맞선 저항: 애틀랜타 드루이드 힐스(Druid Hills)
드루이드 힐스(Druid Hills)는 미국의 대표적인 조경 건축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시니어(Frederick Law Olmsted, Sr.)가 설계한 마지막 주거 지역으로, 그의 아들들까지 포함해 옴스테드 가문 전체가 참여한 유일한 주택 단지였다. 이 지역의 중심은 곡선형 도로인 폰스 데 리온 애비뉴(Ponce de Leon Avenue)와 여섯 개의 공원이 조화를 이루는 녹지 시스템으로, 이곳은 고유한 목가적(Picturesque)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폰스 데 리온 애비뉴를 고속도로로 확장하고, 지미 카터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Jimmy Carter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과 연결하는 도로를 신설하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 계획이 실행될 경우, 지역의 세 개의 선형 공원(linear parks)이 크게 훼손되며, 드루이드 힐스의 독창적인 경관이 영구적으로 손실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강력히 반대하며 저항했고, 결국 1991년 법원의 동의 판결(consent decree)을 이끌어내어 지역의 보존과 보호를 법적으로 보장받았다. 드루이드 힐스에서 벌어진 이 저항 운동은 도시 개발이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침해할 때,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이를 보호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이다. 또한, 자연과 도시 설계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지켜낸 성공적인 도시 보존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LGBTQ+ 권리를 위한 ‘연례 기념의 날(Annual Reminder Day)’: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몰
1969년 뉴욕 스톤월 항쟁(Stonewall Uprising) 이전,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Marches)가 열리기 전, 필라델피아에서는 ‘연례 기념의 날(Annual Reminder Day)’이 있었다. 1965년 7월 4일,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l) 앞에서 미국 최초의 동성애자 및 레즈비언 권리 시위가 열렸다. 이곳은 미국 독립선언서와 헌법이 탄생한 역사적인 장소였으며, 이 시위는 이후 5년간 매년 반복되었다. 이 시위들은 ‘연례 기념의 날’(Annual Reminder Day)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 목적은 미국 대중에게 “동성애자들이 헌법에 의해 보장된 많은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1974년, 이 장소는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 NPS)으로 이관되었으며, 1997년에는 인디펜던스 국립역사공원(Independence National Historical Park, INHP)에 포함되었다. 이곳에는 역사적 해석 자료가 마련되어 있지만, INHP 웹사이트에서는 ‘연례 기념의 날’과 관련된 정보를 LGBTQ+ 역사 페이지와 직접 연결해 놓지 않았다. 이는 LGBTQ+ 인권 운동의 초창기 역사적 순간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며, 이러한 역사적 장소와 운동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노력이 여전히 필요함을 시사한다.



유산 보존 운동의 불씨가 된 풀뿌리 저항: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
뉴욕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 중심부에 위치한 워싱턴 스퀘어 파크(Washington Square Park)는 10에이커 규모의 공공 공간으로, 1827년 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수많은 역사적 시위가 열린 장소이다. 이 공원은 처음에는 군사 행진장(military parade ground)으로 사용되었으며, 1911년에는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화재(Triangle Shirtwaist Fire) 희생자를 기리는 행진이 이곳을 지나갔다. 이 화재는 공원에서 동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산업 재해로,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불러일으켰다. 다음 해인 1912년, 2만 명의 노동자들이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35년, 당시 뉴욕시 공공사업 책임자였던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는 이 공원 한가운데에 주요 도로를 건설하는 재설계 계획을 제안했다. 만약 실행되었다면, 워싱턴 스퀘어 파크는 단순한 공원에서 분리된 교통 공간으로 전락하며, 시민들의 공동 녹지로서의 가치가 크게 훼손될 뻔했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23년 동안 모지스의 모든 제안을 저지하는 풀뿌리 저항 운동을 벌였고, 결국 공원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이 운동은 단순한 공원 보호를 넘어, 뉴욕시 전역에서 역사적 장소 보존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는 오늘날까지도 공공 공간의 중요성과 시민 참여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으며, 뉴욕시의 역사적 보존 노력의 시발점이 된 상징적인 장소로 평가받고 있다.

놀이터를 지켜라: 뉴욕 웨스트 67번가 놀이터의 저항 운동
1956년, 뉴욕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Upper West Side)에서 열린 “센트럴 파크 전투(Battle of Central Park)”는 뉴욕시 공원국장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와 50여 명의 어머니 및 어린이들 간의 대결이었다. 논란의 중심이 된 곳은 센트럴 파크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약 0.5에이커(약 2,000㎡) 규모의 숲이 우거진 부지였다. 이곳은 웨스트 67번가 놀이터(West 67th Street Playground) 옆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모지스는 이 부지를 ‘타번 온 더 그린(Tavern on the Green)’ 레스토랑을 위한 80대 규모의 주차장으로 개발하려 했다. 지역 주민들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연좌 시위(sit-downs)와 항의 운동을 벌였지만, 모지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밀리에 나무를 베어내며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나 이 행태는 격렬한 시민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뉴욕주 대법원 판사 사무엘 호프스타터(Samuel Hofstadter)는 공사 중단 명령(Temporary Injunction)을 내렸다. 이후 두 건의 추가 소송을 포함한 법적 대응이 이어졌고, 결국 모지스는 주차장 건설 계획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그 대신, 1967년 리처드 다트너(Richard Dattner)가 설계한 ‘모험 놀이터(Adventure Playground)’가 웨스트 67번가에 처음으로 조성되었으며, 1968년에는 바로 옆 부지(1956년 시위가 열렸던 장소)에 ‘타 코인 토츠 놀이터(Tarr-Coyne Tots Playground)’가 건설되었다. 이 저항 운동은 단순히 하나의 놀이터를 지키는 싸움이 아니라, 도시 공간이 개발 이익보다 공동체와 아이들의 복지를 우선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센트럴 파크의 녹지를 지켜낸 이 싸움은 뉴욕 시민운동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출처 : www.arch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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